“리더는 혁명적 ‘전환의 힘’ 있어야”
김훈과 CEO들의 ‘남한산성 대화’
삼성경제연구소 등산회원 100명과 산행…인조의 리더십 들려줘
[조인스]2008.02.02 20:48 입력 / 2008.02.02 21:42 수정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작가 김훈이 CEO들을 만났다. 그는 지난 1월 20일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CEO 등산모임인 ‘시애라’ 회원 100여 명과 함께 자신의 소설 무대인 남한산성을 올랐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으로 향해야 했던 인조의 리더십 앞에서 CEO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코노미스트가 다섯 시간에 걸친 눈길 산행과 뒤풀이를 단독으로 동행 취재했다.





무자년 정월의 날씨는 차가웠다. 지난 1월 20일 오전 9시쯤. 삼성경제연구소가 매월 운영하는 CEO 등산모임 ‘시애라’ 회원 100여 명은 옷깃을 여미며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남한산성 입구로 모여들었다. 평소보다 2~3배는 많은 인원이었다. 시애라는 3주년 기념 산행지로 ‘남한산성’을 택했다. 회원 대다수가 오래전부터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무대를 작가와 동행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시애라를 운영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동철 팀장은 “인조가 어가행렬을 한 시기도 그해 정월이었다. 기온은 지금보다 더 차가웠을 것이고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산행을 1월로 정한 것도 그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이 겨울산행을 위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중 기다리던 김훈 작가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귀를 덮은 모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벤치 코트, 바지와 신발까지. 형형한 눈빛과 오뚝 선 코, 굳게 다문 입술. 김훈의 검은색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해 100만 부를 돌파한 『칼의 노래』에서 그려졌던 절대고독의 무장 이순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김훈은 CEO들 앞에서 긴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섰다. 바로 전날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기온은 다소 풀린 듯했지만 산길 곳곳은 얼어붙은 눈으로 미끄러웠다. 모자, 장갑에 등산화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3년째 매월 산을 오르던 CEO들이었지만 언 눈길엔 장사가 없었다. 몇 번씩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느라 모두들 조심조심 산을 올랐다.

처음 답사지로 김훈은 남문을 향했다. 남문은 남한산성 정문으로 인조의 어가행렬이 입성한 문이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지었다. 지금도 그 현판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의 4대문 중에서 현판이 걸려 있는 유일한 문이기도 하다.

산행은 성 안의 종각 사거리-숭렬전-수어장대-서문-북문-행궁으로 이어졌다. 김훈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워낙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100여 명의 참가자를 동시에 이끌고 움직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은 길고 설명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장소 곳곳의 역사적 의미만 짚고 넘어가는 데도 3시간이 소요됐다.

종각 사거리는 남한산성 안의 교통 중심지로 현재의 산성 로터리다.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삼거리와 그 주변 마을로 그려진다. 김훈은 “조선시대 이 삼거리에 큰 종이 매달려 있어 관아에서 종을 쳐 성 안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말했다.

점심식사 후 강의와 질의 응답

백제 시조왕 온조의 사당 숭렬전도 들렀다. 병자호란 때 임금은 김상헌에게 명해 온조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소설에서도 이 부분은 자세히 묘사됐다.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운 지휘소인 수어장대는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크고 웅장했다. 성 안에 갇힌 임금은 서장대에 올라 군사들을 먹이고 격려했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투항할 때 통과한 서문도 둘러봤다. 광나루와 송파 쪽으로 통하는 문이다. 서문 밖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성 안에 있는 사대부와 궁녀들이 서문 앞에 모여 통곡하며 절했다. 임금은 돌아보지 않았다. 서문 밖은 내리막 경사가 가팔랐다. 말이 앞쪽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렸다. 말은 힝힝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 『남한산성』

CEO들도 인조의 마음을 느끼며 가파른 눈길을 걸었던 것일까. 서문 앞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이날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점심 식사 후 열린 김훈의 강의와 질의 응답시간이었다. 김훈의 말은 글과 닮아 있었다. 한 문장을 넘지 않는 말. 조사가 빠진 문장은 글처럼 강렬했다. 20여 분의 강의 내내 CEO들은 숨죽였다. 다음은 김훈의 강연내용 요약이다. (김훈의 어투를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말 그대로를 실었다.)

어떤 사람은 갇힌 성 안에서 달아나야 살길이라고 했습니다. 난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문으로 기어코 들어와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난 이들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이것 역시 그들의 선택일 뿐입니다.

김상헌 대감은 명분에 치우쳐 현실을 못 들여다본 장님이었습니다. 최명길 대감은 적의 노예가 되자고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고 개 돼지의 길로 가자는 말입니다. 이 두 개의 주장이 당대 양대 축을 이뤘습니다. 어떤 자들은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투항하자고 했고 어떤 자들은 오늘은 투항하고 내일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자들은 매일매일 생활에 충실한 서민대중들도 있었지요. 별의별 놈이 다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한 자도 있었습니다. 47일 동안 그 자는 엎드려만 있었습니다. 난 원래 그 아무 말도 안 한 자의 내면을 그리려 하다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내 소설은 미완성입니다.

내가 정 9품이 돼 임금을 따라왔다면 성 안에 들어왔다면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했을까 고민했습니다. 진땀이 나더군요. 난 아마 아무 말도 안 한 자가 됐을 겁니다. 47일 동안 오직 열심히 한 건 ‘말’뿐이었습니다. 싸움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밖과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말 때문이었지요.

난 이 말들의 어느 편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조의 투항은 배를 가르고 죽어야 마땅한 견딜 수 없는 치욕이긴 하지만 약소한 나라가 강한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서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투항하기 전날 밤 김상헌 대감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김 대감 혼자 가면 됩니다. 대신 후손들은 김 대감 자손 만대를 추앙하면 됩니다. 우린 단지 배웅할 뿐입니다. 김 대감의 길이 고귀하고 거룩한 건 알지만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를 순 없습니다. 나는 소설에서 매우 빈약한 희망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만약 거대 담론으로 결론을 냈다면 세상을 속인 것일 것입니다. 나는 신념의 언어를 버리고 사실의 언어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린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지,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수 없습니다. 관념이나 추상으로 엮어지는 신념이란 가치를 난 의심합니다. 일상의 구체성으로 복귀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은 감기라는 병명의 추상을 고치는 게 아니라 감기가 걸려 있는 한 인간을 고치는 것입니다. 구체성 있고 개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 저는 대안을 제시할 순 없습니다. 다만 보여 줄 뿐입니다.”


대작가의 강연이 끝나고 CEO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인조의 번민과 고뇌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무 대안도 없다는 작가의 말에 갈증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작가 개인에 대한 궁금증도 줄을 이었다. 다음은 무작위로 쏟아진 CEO들의 질문과 답변내용이다.


“인조의 투항은 정당했다”

-인조를 CEO로 봤을 때 그의 투항을 어떻게 생각하나. 무능인가, 유능인가.
“무능하지도 않았고 유능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 간 길일 뿐이다. 당신이 인조 입장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처럼 광해군 시대엔 대륙에서 명과 청이 대등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대륙에서 균형이 깨져버리니까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는 능동적으로 선택해 간 것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간 것이다. 인조의 북벌정책이 리더십의 본질이 아니라 투항한 것이 본질이다. 투항하지 않았으면 전멸했을 것이다.”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과감하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조선의 혁명적 전환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돌아선 것이다. 북학은 조정이 이끈 게 아니라 18세기 사대부 지식인 중심의 운동이었다. 만약 임금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훌륭한 리더의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전환시킬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리더다. 리더는 관념이 아닌 사실에 입각해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전 출판사에서 내 책을 광고한다고 시내버스 곳곳에 내 얼굴을 큼지막하게 붙이고 다니더라. 기업이 광고를 하는 행위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도 추악한 것도 아니다. 그건 본래 그런 것이다. 선, 악, 미, 추를 적용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데 실패하면 명백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익을 저버릴 때 그건 악이다.”

-삶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고 다만 지켜볼 뿐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직원들과 태안반도 기름 유출 현장에 가서 봉사를 했다. 지켜만 보고 있기엔 현실은 너무 잔혹하고 암담하다.
“내가 지켜볼 뿐이라는 건 글 쓰는 자의 마음자세를 말한 것이다. 글 쓰는 자가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글은 남아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다. 태안사태가 나자마자 나도 내려가 이틀 동안 기름을 닦고 왔다. 바다에 떠 있는 유조선을 보니까 이 세상에 돌아다녀서는 안 될 공룡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크레인도 너무 무서웠다. 난 너무 무력했다.”

-당신은 가난한 기자에서 지금은 100만 부 저서의 작가로 부자가 됐다. 돈에 대한 당신의 철학은 무엇인가.
“돈은 아름답다. 난 아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시킨다. 난 돈을 사랑하고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이 자기 인격을 완성시키는 길은 자기 손으로 자기 밥을 벌어먹을 때다. 80년대 봉투에 월급이 나오던 기자 시절, 돈을 세며 치욕을 느꼈고 그 봉투에서 뺀 돈으로 술을 먹으면서 비굴함을 완성했다.(웃음) 손가락에 침을 뱉어 돈을 세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한때 그 풍경을 미워한 것을 후회한다.”

‘브락케토’와인으로 건배

참가자들의 산행 소감은 다양했다.

코리아헤드의 정철호 대표는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앞날을 예측 못하고 신망을 잃으면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며 “국가 리더든 기업 CEO든 외부 환경에 대해 항상 민감하게 예측해야 하는데 인조는 정보에 어두웠고 실리보다 명분에 치중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옥외광고 대행사를 운영하는 공창원 그린미디어 사장은 “요즘 광고시장이 예전 같지 않다”며 “나라가 힘이 없어 성 안으로 들어간 인조나 기업 경영이 힘들어 문을 닫거나 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기업인의 마음이나 뭐가 다르겠나. 이번 산행으로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년에 300권의 책을 읽는다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김복규 실장은 “나라 일을 결정할 때 소설 속의 김상헌과 최명길처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최종 결정하는 건 결국 CEO의 몫”이라며 “리더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저축은행의 윤현수 회장은 “문체가 특이하고 강렬해 평소 김훈 작가의 책은 다 읽었다”며 “소설 속의 남한산성을 작가와 함께 느끼고 카메라에 옮기는 작업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김훈과 CEO들은 행사 마지막 순서로 와인 잔을 들었다. 와인 이름은 이탈리아산 브락케토. 로마 전성기 때 즐겨 마시던 와인이다. 참가자들은 “비굴과 울분의 역사를 잊고 새해 희망을 다지자”며 건배했다.

소설 『남한산성』은…

372년 전 겨울. 인조의 어가행렬은 청의 진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어섰다. 1636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인조는 47일간 고립무원의 성 안에 갇혀 있었다.

소설 『남한산성』은 ‘도대체 그 성 안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라는 작가 김훈의 상상에서 시작됐다. 쓰러진 왕조 앞에서도 명분과 의리를 내세워 결사 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실리를 챙기는 것이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의 이야기가 양대 축을 이룬다.

그 둘 사이에서 번민하는 임금 인조와 ‘말’의 싸움에 무관심하며 묵묵히 일상에 몰두하는 일반 하층민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고뇌와 번민을 김훈 특유의 강렬한 문체로 그려낸 이 소설은 지난해 4월 발간 이후 8개월 만에 40만 부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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