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있고 투명해서 좋습니다....

비리 인사 공천 배제’라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정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위원장 박재승). 그중에서도 7명의 외부 인사를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부른다.
박 위원장이 투수 설까치라면 이이화 위원은 포수 백두산 같다. 오랜 친구인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강공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 위원은 강골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평생 재야 사학, 민중사학이란 험한 길을 걸어왔다.
주역의 대가였던 부친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처럼 정치를 외면해온 그가 공천심사에 뛰어든 배경부터 물었다. 그는 공천심사가 한창인 7일 점심 시간을 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어떻게 공천심사위원이 되셨나요.
“박재승 위원장이 오래전부터 친구예요. 한 날은 전화가 와 자꾸 만나자고, 그냥 전화로 얘기하라고 했더니 같이 일하자는 겁니다. 그 소리 듣고 그냥 끊어버렸어요. 그런데 3일 동안 자꾸 도와 달라는 거야. 과거 역사에만 매달려 있지 말라고, 역사학자가 나서야 한다고…결국 설득당했죠.”

-그동안 정치는 멀리해 오셨는데.
“정치에 계속 나서지 않았죠. 대통령 후보나 국회의원들이 무슨 후원회장 해 달라, 유세해 달라 요청 많이 했지만 일절 관여하지 않았죠. 그동안 민주세력이 실패하고 분열하고 재통합하고 이런 과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국민이 (민주당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니…과연 그만큼 잘못해 그런 것인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때로는 울분도 느끼고, 때로는 한탄스럽기도 하고….”

-그러다 이번에 정치권에 발을 담근 것은.
“이게 본격적인 정치 참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행위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참여해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

-심사 과정에서 평가 기준은.
“인간의 내면이라는 건 들여보기가 어려운 일이죠. 정치인이란 때로는 수완도 좋아야 해요. 이이화같이 꽁생원이 정치를 하면 낙제점을 받는다고요. 그러나 이 시대에는 능력과 함께 도덕성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덕성에는 품위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금품수수 등으로 처벌받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반인권적인 행동을 한다든지, 여성을 비하한다든지,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든지…. 모두 점검해야죠. 이런 원칙들이 있는데 다 고려하려니까 힘이 들어요. 시간도 없고. 제대로 하려면 이렇게 서둘러선 안 되는데….”

-심사 과정에서 본 정치인의 모습이 평소 알던 정치인과 다르던가요.
“부동산 투기 하고 돈이나 벌었던 사람들이 아무런 학식이 없는 경우를 보면 정말 한심해요. 면접에서 삼권분립을 물어봤는데 모르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물론 돈 버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수준이 너무 문제가 되잖아요.”

-심사하면서 정치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나요.
“내가 이해하는 부분도 있지만, 나빠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정치인을 이렇게 접해 보니까, 전부 자기 이해와 정파에 매달리더라고요. ‘쇄신하자’거나 ‘정파를 떠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들어가 보면 자기들끼리 정파적인 이익에 얽혀 있더라고요. 겉 다르고 속 다른 소릴 하는 것이죠. 이런저런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이해와 정파를 벗어난 공천을 하고 있나요.
“나는 해방 이후 이번 공천심사위원회만큼 당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없었다고 봐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무엇보다 국민의 생각이 달라졌어요. 정치인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식이 생긴 것 같아요. 또 하나는 통합민주당이 그런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다 보니 위기감이 대단해요. 돌파할 방법을 구상하다가 이런 방법을 쓴 거 같아요.”

-아마추어(심사위원)들이 월권한다고, 무슨 난(亂)이란 말까지 나옵니다.
“맘에 들면 혁명(革命)이고, 맘에 안 들면 난이라고 하는 거지. 우리야 물론 아마추어지. 그러니까 그들과 기준이 다른 겁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기들끼리 했으면 이번에 절대로 비리 전력자 배제 원칙 같은 것 못 만들었을 겁니다. ”

-일부에선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손학규 대표가 남의 칼을 빌려 숙청한다는 뜻에서.
“그건 내가 단언하지만, 거꾸로예요, 거꾸로. 반대예요. (손 대표는 지금) 당황하고 있어요. 심사위원회를 자기가 만들고서는 자기가 당황하고 있는 거예요.”

-외부 위원을 강성으로 위촉할 때는 상당한 변화를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위원 구성이 조금 강성이긴 하죠. 하지만 여기까지 갈지는 몰랐을 겁니다. 아까 단언했듯이 절대로 정치적 음모는 없습니다.”

-이번 공천심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외부사람을 데려다 이 정도로 공천심사를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처음일 겁니다. 이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앞으로 이런 제도를 활용하려는 정당이 생기겠죠. 그러면 공천이란 제도가 실제 정치 개혁의 장치가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만한 사례가 있을까요.
“조선 정조가 10년 넘게 지속적인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고 나서 반동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것이 무너졌어요. 우리 역사에서 근대를 열어 나가는 데 하나의 좌절이라고 볼 수 있죠. 개혁이 그만큼 어려워요. 개혁이라는 것은 제도로서 정착되어야 하는 겁니다. 정조의 개혁이 좌절된 데는 민중이 그만큼 받쳐주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앞으로 국민이 공천 개혁을 받쳐줘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제도로 정착할 수 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혁세력의 일이라고 해 모든 것이 합당한 것은 아니죠. 시행착오도 있는 것이고, 그중에는 모략이나 하고 부정한 돈을 받는 사람도 있죠. 이번에도 억울한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미래를 열기 위한 하나의 진행 과정인 것입니다. 개인적 인권이나 인격을 존중해야겠지만 그런 희생을 통해 역사는 진전하는 것이지, 세상에 완벽하게 개인의 억울함을 다 풀어주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 일어났을 때 착한 놈은 살고 악한 놈만 죽던가요. 다 몰아 죽는 거예요. 희생을 밟고 역사가 진전한다는 큰 관점에서 일을 진행하다 보면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돼 좋은 결실이 올 거라고 봅니다.”

-안희정씨는 ‘조선시대 중국에 잡혀갔던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목욕함으로써 새 출발을 인정받는 것’과 같은 계기를 달라고 하는데.
“의미도 모르고 투박하게 사용한 겁니다. 적절치 않습니다. 환향녀들이야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피동적으로 끌려갔다 온 데다 돌아온 고향에서 받은 수모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기본적인 인권 차원에서 그런 장치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에 공천 탈락한 사람들의 경우는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정권에 들어가 이유가 어떻게 됐든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것 아닙니까. 환향녀들과 어떻게 동일시할 수 있습니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7층 회의실 입구에서 설훈 의원이 계속 농성 중이던데.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계륜 사무총장처럼 깨끗하게 승복해야지요. 나이도 젊고 미래도 있는데 말입니다. 대세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일단 조용히 수용한다면 4년 뒤엔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정치인은 참을 줄을 모르더라고요. 좀 참으면 될 텐데. 참는 기간도 있어야 되는 법이거든요.”

-노무현 정권이 왜 좋은 평가를 못 받을까요.
“경제적 운용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조건도 달랐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밀실이라서 뭘 해먹어도 얼마나 해먹었는지 몰랐습니다. 요즘에는 다 드러나잖아요. 부정은 상대적으로 옛날보다 적은데 여전히 정치권이 썩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심사 면접하면서 보니 민주당 현역 의원들 재산이 보통 3억~5억원밖에 안 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 정도면 그냥 집 한 채에 불과하죠.”

-이명박 대통령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데 대해서는.
“아마도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그런 면이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반동정권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큰 틀에서 이런 시기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대통령 성격이 조금 독단적인 면이 있는 것 같지만 유신이 다시 찾아올 리는 없잖아요. 우리 사회가 이미 그런 정도로 진전된 것입니다.”


이이화
1937년 주역의 대가 이달(李達)의 아들로 경북 지례(김천)에서 태어나 15세까지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주역을 배움.
신학문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아버지에 반발해 가출. 독학으로 광주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학원 문예창작과 입학했다가 중퇴. 동아일보 조사부에서 근무하면서 신동아 등에 역사 관련 기획물을 연재하는 업무를 맡다가 본격적인 역사 공부를 위해 국역연수원에 입학, 이후 독학으로 역사 연구.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역사를 연구하다가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하고 계간 ‘역사와 비판’ 창간.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오병상·이종찬 기자 j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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