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귀환...개척정신과 도전정신, 나도 광고를 봤는데,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왠지 여유가 있더라구.

그야 말고 재왕의 여유라 할까, 우리시대에 필요한 정신 도전,개척 그런 것이야....

왕회장’ 의 귀환 … 고 정주영회장, 현대중 광고에

[중앙일보]2008.02.06 04:57 입력 / 2008.02.06 07:02 수정
‘왕(王)회장’으로 불렸던 고(故) 정주영(사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설 연휴부터 현대중공업 TV 광고에 등장한다. 광고대행사인 이노션 관계자는 “6일부터 현대중공업의 기업 이미지 광고에 정 명예회장의 다큐멘터리 영상자료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영상자료는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대학 강연에서 현대중공업의 창업 과정을 소개하는 장면이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건 ‘백사장과 설계도면’뿐이었지만 해외에 나가 당당하게 수주를 했다”는 말도 들어 있다.

이노션 측은 “정 명예회장의 조선소 설립 과정을 소개하는 육성을 공개함으로써 그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을 알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신문 광고에서 정 명예회장이 즐겨 썼던 ‘해봤어?’ ‘우리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되고 나라가 잘 돼야 우리가 잘 된다’ 는 어록을 잇따라 내기도 했다.

광고를 제작한 이노션은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큰 딸인 정성이 고문이 만든 회사다. 2000년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인 ‘왕자의 난’ 이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광고는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이 지난달 범 현대가의 도움을 받아 만도기계를 다시 인수한 것처럼 현대가의 우애를 보여준 또 하나의 예가 될 것 같다.

김시래 기자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의 외인구단 (이이화, 박재승)  (1) 2008.03.10
서울시 신청사 설계 당선 - 유걸  (0) 2008.02.19
김훈(남한산성)  (0) 2008.02.04
강우현 남이섬 사장  (0) 2008.02.01
박태준  (0) 2008.01.29
by 끝없는 바다 2008. 2. 6. 23:38
“리더는 혁명적 ‘전환의 힘’ 있어야”
김훈과 CEO들의 ‘남한산성 대화’
삼성경제연구소 등산회원 100명과 산행…인조의 리더십 들려줘
[조인스]2008.02.02 20:48 입력 / 2008.02.02 21:42 수정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작가 김훈이 CEO들을 만났다. 그는 지난 1월 20일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CEO 등산모임인 ‘시애라’ 회원 100여 명과 함께 자신의 소설 무대인 남한산성을 올랐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으로 향해야 했던 인조의 리더십 앞에서 CEO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코노미스트가 다섯 시간에 걸친 눈길 산행과 뒤풀이를 단독으로 동행 취재했다.





무자년 정월의 날씨는 차가웠다. 지난 1월 20일 오전 9시쯤. 삼성경제연구소가 매월 운영하는 CEO 등산모임 ‘시애라’ 회원 100여 명은 옷깃을 여미며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남한산성 입구로 모여들었다. 평소보다 2~3배는 많은 인원이었다. 시애라는 3주년 기념 산행지로 ‘남한산성’을 택했다. 회원 대다수가 오래전부터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무대를 작가와 동행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시애라를 운영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동철 팀장은 “인조가 어가행렬을 한 시기도 그해 정월이었다. 기온은 지금보다 더 차가웠을 것이고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산행을 1월로 정한 것도 그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이 겨울산행을 위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중 기다리던 김훈 작가가 나타났다. 그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귀를 덮은 모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벤치 코트, 바지와 신발까지. 형형한 눈빛과 오뚝 선 코, 굳게 다문 입술. 김훈의 검은색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해 100만 부를 돌파한 『칼의 노래』에서 그려졌던 절대고독의 무장 이순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김훈은 CEO들 앞에서 긴 말을 하지 않고 앞장섰다. 바로 전날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기온은 다소 풀린 듯했지만 산길 곳곳은 얼어붙은 눈으로 미끄러웠다. 모자, 장갑에 등산화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3년째 매월 산을 오르던 CEO들이었지만 언 눈길엔 장사가 없었다. 몇 번씩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느라 모두들 조심조심 산을 올랐다.

처음 답사지로 김훈은 남문을 향했다. 남문은 남한산성 정문으로 인조의 어가행렬이 입성한 문이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지었다. 지금도 그 현판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의 4대문 중에서 현판이 걸려 있는 유일한 문이기도 하다.

산행은 성 안의 종각 사거리-숭렬전-수어장대-서문-북문-행궁으로 이어졌다. 김훈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워낙 말수가 적기도 했지만 100여 명의 참가자를 동시에 이끌고 움직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은 길고 설명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장소 곳곳의 역사적 의미만 짚고 넘어가는 데도 3시간이 소요됐다.

종각 사거리는 남한산성 안의 교통 중심지로 현재의 산성 로터리다.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삼거리와 그 주변 마을로 그려진다. 김훈은 “조선시대 이 삼거리에 큰 종이 매달려 있어 관아에서 종을 쳐 성 안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말했다.

점심식사 후 강의와 질의 응답

백제 시조왕 온조의 사당 숭렬전도 들렀다. 병자호란 때 임금은 김상헌에게 명해 온조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소설에서도 이 부분은 자세히 묘사됐다.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운 지휘소인 수어장대는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크고 웅장했다. 성 안에 갇힌 임금은 서장대에 올라 군사들을 먹이고 격려했다.

임금이 삼전도에서 투항할 때 통과한 서문도 둘러봤다. 광나루와 송파 쪽으로 통하는 문이다. 서문 밖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성 안에 있는 사대부와 궁녀들이 서문 앞에 모여 통곡하며 절했다. 임금은 돌아보지 않았다. 서문 밖은 내리막 경사가 가팔랐다. 말이 앞쪽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렸다. 말은 힝힝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 『남한산성』

CEO들도 인조의 마음을 느끼며 가파른 눈길을 걸었던 것일까. 서문 앞에서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이날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점심 식사 후 열린 김훈의 강의와 질의 응답시간이었다. 김훈의 말은 글과 닮아 있었다. 한 문장을 넘지 않는 말. 조사가 빠진 문장은 글처럼 강렬했다. 20여 분의 강의 내내 CEO들은 숨죽였다. 다음은 김훈의 강연내용 요약이다. (김훈의 어투를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말 그대로를 실었다.)

어떤 사람은 갇힌 성 안에서 달아나야 살길이라고 했습니다. 난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선택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문으로 기어코 들어와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난 이들을 존경하지도 않습니다. 이것 역시 그들의 선택일 뿐입니다.

김상헌 대감은 명분에 치우쳐 현실을 못 들여다본 장님이었습니다. 최명길 대감은 적의 노예가 되자고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고 개 돼지의 길로 가자는 말입니다. 이 두 개의 주장이 당대 양대 축을 이뤘습니다. 어떤 자들은 오늘은 싸우자고 했다가 내일은 투항하자고 했고 어떤 자들은 오늘은 투항하고 내일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자들은 매일매일 생활에 충실한 서민대중들도 있었지요. 별의별 놈이 다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한 자도 있었습니다. 47일 동안 그 자는 엎드려만 있었습니다. 난 원래 그 아무 말도 안 한 자의 내면을 그리려 하다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내 소설은 미완성입니다.

내가 정 9품이 돼 임금을 따라왔다면 성 안에 들어왔다면 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했을까 고민했습니다. 진땀이 나더군요. 난 아마 아무 말도 안 한 자가 됐을 겁니다. 47일 동안 오직 열심히 한 건 ‘말’뿐이었습니다. 싸움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밖과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말 때문이었지요.

난 이 말들의 어느 편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조의 투항은 배를 가르고 죽어야 마땅한 견딜 수 없는 치욕이긴 하지만 약소한 나라가 강한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로서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투항하기 전날 밤 김상헌 대감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김 대감 혼자 가면 됩니다. 대신 후손들은 김 대감 자손 만대를 추앙하면 됩니다. 우린 단지 배웅할 뿐입니다. 김 대감의 길이 고귀하고 거룩한 건 알지만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를 순 없습니다. 나는 소설에서 매우 빈약한 희망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만약 거대 담론으로 결론을 냈다면 세상을 속인 것일 것입니다. 나는 신념의 언어를 버리고 사실의 언어로 돌아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린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우는 것이지,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수 없습니다. 관념이나 추상으로 엮어지는 신념이란 가치를 난 의심합니다. 일상의 구체성으로 복귀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은 감기라는 병명의 추상을 고치는 게 아니라 감기가 걸려 있는 한 인간을 고치는 것입니다. 구체성 있고 개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 저는 대안을 제시할 순 없습니다. 다만 보여 줄 뿐입니다.”


대작가의 강연이 끝나고 CEO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들은 인조의 번민과 고뇌에 대해 더 듣고 싶어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무 대안도 없다는 작가의 말에 갈증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작가 개인에 대한 궁금증도 줄을 이었다. 다음은 무작위로 쏟아진 CEO들의 질문과 답변내용이다.


“인조의 투항은 정당했다”

-인조를 CEO로 봤을 때 그의 투항을 어떻게 생각하나. 무능인가, 유능인가.
“무능하지도 않았고 유능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 간 길일 뿐이다. 당신이 인조 입장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처럼 광해군 시대엔 대륙에서 명과 청이 대등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대륙에서 균형이 깨져버리니까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인조는 능동적으로 선택해 간 것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간 것이다. 인조의 북벌정책이 리더십의 본질이 아니라 투항한 것이 본질이다. 투항하지 않았으면 전멸했을 것이다.”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과감하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조선의 혁명적 전환은 ‘북벌’에서 ‘북학’으로 돌아선 것이다. 북학은 조정이 이끈 게 아니라 18세기 사대부 지식인 중심의 운동이었다. 만약 임금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훌륭한 리더의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할 수 있다. 전환시킬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리더다. 리더는 관념이 아닌 사실에 입각해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예전 출판사에서 내 책을 광고한다고 시내버스 곳곳에 내 얼굴을 큼지막하게 붙이고 다니더라. 기업이 광고를 하는 행위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도 추악한 것도 아니다. 그건 본래 그런 것이다. 선, 악, 미, 추를 적용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데 실패하면 명백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익을 저버릴 때 그건 악이다.”

-삶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고 다만 지켜볼 뿐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직원들과 태안반도 기름 유출 현장에 가서 봉사를 했다. 지켜만 보고 있기엔 현실은 너무 잔혹하고 암담하다.
“내가 지켜볼 뿐이라는 건 글 쓰는 자의 마음자세를 말한 것이다. 글 쓰는 자가 삶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글은 남아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다. 태안사태가 나자마자 나도 내려가 이틀 동안 기름을 닦고 왔다. 바다에 떠 있는 유조선을 보니까 이 세상에 돌아다녀서는 안 될 공룡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크레인도 너무 무서웠다. 난 너무 무력했다.”

-당신은 가난한 기자에서 지금은 100만 부 저서의 작가로 부자가 됐다. 돈에 대한 당신의 철학은 무엇인가.
“돈은 아름답다. 난 아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시킨다. 난 돈을 사랑하고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이 자기 인격을 완성시키는 길은 자기 손으로 자기 밥을 벌어먹을 때다. 80년대 봉투에 월급이 나오던 기자 시절, 돈을 세며 치욕을 느꼈고 그 봉투에서 뺀 돈으로 술을 먹으면서 비굴함을 완성했다.(웃음) 손가락에 침을 뱉어 돈을 세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지만 한때 그 풍경을 미워한 것을 후회한다.”

‘브락케토’와인으로 건배

참가자들의 산행 소감은 다양했다.

코리아헤드의 정철호 대표는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앞날을 예측 못하고 신망을 잃으면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며 “국가 리더든 기업 CEO든 외부 환경에 대해 항상 민감하게 예측해야 하는데 인조는 정보에 어두웠고 실리보다 명분에 치중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옥외광고 대행사를 운영하는 공창원 그린미디어 사장은 “요즘 광고시장이 예전 같지 않다”며 “나라가 힘이 없어 성 안으로 들어간 인조나 기업 경영이 힘들어 문을 닫거나 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기업인의 마음이나 뭐가 다르겠나. 이번 산행으로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년에 300권의 책을 읽는다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김복규 실장은 “나라 일을 결정할 때 소설 속의 김상헌과 최명길처럼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최종 결정하는 건 결국 CEO의 몫”이라며 “리더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저축은행의 윤현수 회장은 “문체가 특이하고 강렬해 평소 김훈 작가의 책은 다 읽었다”며 “소설 속의 남한산성을 작가와 함께 느끼고 카메라에 옮기는 작업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김훈과 CEO들은 행사 마지막 순서로 와인 잔을 들었다. 와인 이름은 이탈리아산 브락케토. 로마 전성기 때 즐겨 마시던 와인이다. 참가자들은 “비굴과 울분의 역사를 잊고 새해 희망을 다지자”며 건배했다.

소설 『남한산성』은…

372년 전 겨울. 인조의 어가행렬은 청의 진격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어섰다. 1636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인조는 47일간 고립무원의 성 안에 갇혀 있었다.

소설 『남한산성』은 ‘도대체 그 성 안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라는 작가 김훈의 상상에서 시작됐다. 쓰러진 왕조 앞에서도 명분과 의리를 내세워 결사 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실리를 챙기는 것이 국익을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의 이야기가 양대 축을 이룬다.

그 둘 사이에서 번민하는 임금 인조와 ‘말’의 싸움에 무관심하며 묵묵히 일상에 몰두하는 일반 하층민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고뇌와 번민을 김훈 특유의 강렬한 문체로 그려낸 이 소설은 지난해 4월 발간 이후 8개월 만에 40만 부를 넘어섰다.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의 외인구단 (이이화, 박재승)  (1) 2008.03.10
서울시 신청사 설계 당선 - 유걸  (0) 2008.02.19
개척정신과 도전정신  (0) 2008.02.06
강우현 남이섬 사장  (0) 2008.02.01
박태준  (0) 2008.01.29
by 끝없는 바다 2008. 2. 4. 08:39
[리빙 앤 조이] 어떤 마법으로 남이섬을 바꿨을까?
강우현 남이섬 사장
"구조조정? 80정년· 종신 직원도 있어요!"


우현석기자 hnskwoo@sed.co.kr

남이섬(나미나라 공화국)은 얼마 전까지 그저 그런 유원지였다.

기자가 81년과 2000년에 들렀던 남이섬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린 그 흔한 유원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강물에 녹이 슬고, 물이끼가 낀 도선(渡船)을 타고 도착한 남이섬에는 곳곳에 소주병이 뒹굴고, 500원 짜리 동전을 넣으면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는 야구장과 성인 캬바레가 있었다.

그리고 그 촌스런 배경 안에는 기타를 메고 MT를 온 것으로 보이는 대학생들과 불량스러워 보이는 중고생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 우연찮게 들른 남이섬은 예전의 추레한 모습이 아니었다.

섬을 뒤덮은 노란 은행잎, 오색 단풍을 뒤집어 쓴 나무들, 갤러리 같은 호텔과 작업실은 기삿거리에 굶주린 기자의 침샘을 자극했다.

섬을 찾는 이들은 젊은 층에서 가족 단위까지 다양했고,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의 숫자도 적지 않아 보였다.

인터넷과 인터뷰를 통해 취재한 남이섬의 변화는 외양의 변신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1년 27만 명에 그쳤던 방문객은 2007년 162만 명으로 늘었고, 20억원에 그쳤던 매출은 100억원을 돌파했다. 매출과 순익의 규모는 조그만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하지만 무시해도 좋을 만한 투자에 비하면 그 성과는 놀라웠고, 무엇 보다 창의력이 빚어낸 다양한 콘텐츠가 기발했다.

입소문이 퍼지자 지자체와 기업들이 변화와 창조적 경영을 배우기 위해 남이섬을 찾았고, 지난해 강우현 사장의 강연을 듣고 간 연 인원은 1만 명에 달했다.

기삿거리는 변신한 남이섬이 아니라, 변신을 주도한 강우현 사장인 듯 싶었다.

강우현 주식회사 남이섬사장을 만나러 가는 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졌다.

약속시간을 11시로 잡아 놓고 9시에 서울을 출발을 했는데, 도로에 눈이 쌓여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일 날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약속을 다른 날로 옮겨 보려고 남이섬에 전화를 했더니 ‘이미 기자를 만나러 서울자택을 출발을 했으니 예정대로 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체인을 사서 자동차 바퀴에 감았다. 남이섬으로 향하는 길에 차들은 엉금엉금 기었고, 후륜 구동의 고급 외제차들은 비싼 몸값이 민망할 정도로 갓길로 나가 떨어졌다.

그렇게 쪼그라 붙은 간을 부여잡고 남이섬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난 오후 12시가 넘어서였다. 가을에 온통 노란 은행잎으로 물 들었던 남이섬은, 하얀 눈밭이었고 군데군데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니 강사장이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집고 나타났다.

"사장취임 4년 만에 입장객 4배 고용 보장, 연봉은 매년 갱신 정주영회장이 경영학과 나왔나? 지출 보다 수입 많으면 되는거지" 상상력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예술가들 참여가 성공의 요인 카바레·노래방 없애버리고 갤러리·아트숍 등으로 면모 일신

-어쩌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얼마 전에 미끄러졌어요. 거의 다 나았는데, 또 넘어지는 바람에 다친 곳을 또 다쳤어요.

강사장의 첫 인상은 다리를 다쳐 거동은 불편해 보였지만 말이 빠르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강사장께서 남이섬 사장으로 취임한 2001년 방문객 숫자가 27만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매출과 방문객은 얼마나 됩니까.

▦방문객 162만 명에 매출은 100억원이 넘었어요. 3년째 방문객 160만 명에 매출 100억원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동안 가파른 성장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중간 바닥을 다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6~7년째 성장 가도를 달려왔어요. 잘 나가는 기업들도 대체로 3년 이상은 성장을 이어가지 못한다고 보면 이 같은 숨고르기는 필요한 셈이지요.

게다가 관광산업은 이미지 산업이라 이미지가 한 번 실추되면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난 3년간은 매출이나 입장객 숫자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네트워크 강화와 문화행사, 저변 확대에 초점을 맞춰왔어요. 남이섬이 중장기적으로 30년은 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해 온거지요.

사전에 조사한 그의 경력은 디자인 회사을 운영하던 CEO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남이섬을 운영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남이섬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2000년 12월31일에 아들과 남이섬에 놀러 왔었어요. 그 때 받은 느낌은 '자연경관과 환경은 좋은데 관리가 안돼 있구나'하는 것이었어요.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고 3일간 머무르면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어요. 그런데 마침 남이섬 대표이사와 주주들이 왔길래 그 분들과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과 장점이 많은데 왜 방치하고 있냐'고 했더니 그 분들이 작업장을 하나 내주면서 여기서 한번 지내보라고 하더군요. 그걸 고치고 다듬고 하면서 남이섬에 머물렀어요. 그런데 남이섬을 찾은 방문객들이 우리 집 앞에만 몰려들고, 사진을 찍어 대고 그러는거라.

그러다가 그해 7월쯤에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그 분들이 '차라리 남이섬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장을 맡아달라'고 제안을 해왔어요. 그래서 내가 조건을 달았지. 최소 1년 간은 간섭을 하지 말아달라고. 대신 월급은 100원만 받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남이섬의 매출을 1년 안에 두 배로 늘려 놓겠다고 했지. 그리고 매출이 40억원을 넘으면 초과분은 내가 갖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내가 사장을 맡은 첫 해에 매출은 40억원을 훨씬 넘었어요. 물론 월급을 100원만 받지도 않았고, 40억원 초과분을 내가 가져 가지도 않았지. 그 분들이 남이섬을 나에게 맡긴 의도는 단순했어요. 남이섬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데다, '디자이너가 사장을 맡으면 신문에도 나고 홍보도 될 거 아니냐'고 생각한거 같아요.

-미술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이섬 사장에 취임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캐릭터, CI등을 취급하는 디자인회사를 하고 있었어요. 관광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었지요.

-강사장께서는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날 남이섬이 이렇게 바뀐 것은 사장님의 창조적 발상 때문입니까. 아니면 경영자적 자질이 큰 몫을 한 겁니까.

▦나는 일반 기업의 CEO들 하고는 계산 방법이 달라요. 사실 기업 경영이라는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처럼 단순한 문제거든. 정주영 회장이 경영학과 나왔나? 예수가 철학 전공해서 인류 구원하게 된 건 아니거든.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감동하는 거나, 남이섬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 받는 것은 같은 이치거든.

나는 경영이라는게 그냥 나가는 돈 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으면 되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시각으로 보면 정치나 경영이나 결국은 디자인이요. 남이섬 경영에도 그런 생각을 그대로 적용했어요. 내가 취임하자마자 구조조정을 했지. 구조조정이라는게 사람을 자르는 것만 구조조정이 아니잖아요. 내가 생각한 구조조정은 고용을 늘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사람을 더 뽑는 구조조정을 했지. 참, 그거 알아요? 우리 남이섬주식회사는 종신 직원도 있어요.

-종신 직원은 몇 살까지 근무하나요.

▦일반 직원들은 55세가 정년이고, 정년이 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인사위원회를 열어서 임원평가와 다면평가를 거쳐 결정해요. 그 중 일부는 정년을 80세까지 늘려줬고, 80세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월 80만원을 주기로 한 사람이 4명이에요. 정년을 보장해주니 확실히 내부 조직이 안정되고 있어요. 조직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장점이고.

-직원들의 긴장이 이완되지는 않나요.

▦우리 직원들은 고용은 보장되지만 연봉은 해마다 갱신하는 계약직이에요. 올해 연봉 계약은 이미 마무리됐어요. 연봉계약에 앞서 직원 들이 서로 다면평가를 해요.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전년 보다 최고 25%를 더 주고,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은 10%까지 깎도록 돼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7%만 적용시켰지.

또 우리회사는 평생을 보장하는 대신 직급이 평사원과 팀장 둘 뿐이에요. 이유는 장기적으로 먹고 살게 해주기 위해서예요. 연공서열 따져서 임금 주고 퇴직금 주면 다 망해요. 그래서 55세까지는 임금을 계속 올려 주고, 그 이후에는 55세 급여의 80%로 정년까지 가는 거야. 정년 때 200만원 받았으면 여든이 돼도 160만원을 받는 거지.

-남이섬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벤치마킹 하러 오는 지자체나 공무원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고 하던데, 얼마나 됩니까.

▦내가 작년에 교육한 사람이 1만 명쯤 되요. 지자체는 한 달에 10곳 이상은 교육을 받으러 와요. 공무원들 입장에서 볼 때는 남이섬이 단기간에 바뀌고 있다는 게 배울 점이고, 아무 것도 없는데서 시작했다는 것도 배울 점인 것 같아요. 경기도는 김문수 지사가 한번 와보고는 산하 공무원들은 다 다녀오라고 지시를 해서 다들 다녀갔어요.

-새해에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나요.

▦연초에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상'에 남이섬 서울센터를 냈어요. 이제는 남이섬을 서울로 들고 나가서 세일즈를 할거요. 인사동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운행할 계획이고. 또 해외거점도 마련할거예요. 그 거점들은 밖으로 나가는 거점이 아니라 밖에서 남이섬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거점들이 될거예요. 베이징 나미나라(남이섬의 다른 이름)도 이미 운영중이에요.

지난해 11월 7일 베이징에서 국제창의(創意)엑스포를 개최했는데 35개국+1개 나라(나미나라)가 참가했어요. 중국이 나를 총통자격으로 초청해서 귀빈실로 입국을 시키더라고. 남이섬의 창의성에 걸 맞는 대우를 해준거지. 그래서 주(駐)중국 남이섬 대사도 임명하고 왔어요. 다 엉터리 같고, 장난 같은 동화적 상상이지만 거기에 디자인을 덧 입히면 현실이 되는 거예요. 요즘 상상경영, 창조경영, 청개구리 경영 등 얘기가 많이 나오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상상만 하지말고, 구상(디자인)을 해야 구체화하는 거에요. 상상만하면 공염불에 그치는 거지 뭐.

-얼마전 관광공사 오지철 사장을 인터뷰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기된 문제들 중 하나가 관광지와 지자체의 관광객 수용태세였습니다. 지자체나 공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강사장께서 남이섬을 바꿀 때 들인 노력 보다 수월하게 관광환경을 바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되는데 동의하십니까.

▦어! 오지철 사장이 관광공사로 갔어? 그 양반 참 괜찮은 분인데. 서울 가면 안부 좀 전해줘요. 그건 그렇고. 그건 힘들거에요. 이유는 공무원들이 우리 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에요. 우리 같은 아티스트들은 상상하는 걸 말할 수 있고, 그림으로 그릴 수 있지만, 공무원이나 일반인들은 그게 쉽지 않아요. 우리 처럼 관광지를 꾸미려면 지자체에서는 용역을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관료들 스스로 디자인 한 것을 손으로 메만질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 봅시다. 남이섬은 유원지 시설, 놀이시설 다 없앴어요. 관광객들이 캬바레나 노래방에서 놀려고 남이섬에 오는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일반인들은 그게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아요. 요즘 한류 타령들 하는데 나는 3년 이상 못 간다고 봐요. 그래서 겨울연가 관련 조형물들은 2년이 지나면서 치워버렸어요.

관광객들이 그걸 계기로 왔지만 남이섬은 찾아올 때 마다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요. 그게 어마어마한 시설이어야 되냐? 그럴 필요는 없어요. 들어오다 남이섬 입구에 얼음분수 봤지요. 그냥 분수를 얼려서 만든거에요. 창조적 재활용을 한거지.

-기사에서 보니까 남이섬 곳곳에 설명 간판이 없는 것은 직원들에게 직접 물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던데, 누가 직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건 설명 간판을 미처 못 만든 것도 있고…. 그렇지만 여기 컨셉은 자유예요. 아닌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간섭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사장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이런저런 참견을 해요. 그런 사람들은 이미 남이섬이 가슴속에 들어와 있는 거지. 나는 그 사람들 마음의 60%만 채워주는 거야.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방문자들의 몫이예요.

-남이섬을 찾아 오는 관광객 중 외국인과 내국인의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요.

▦지난해 방문객 162만명 중 18만5,000명이 외국인이었어요. 비율로 보면 11%정도지요. 외국인이 10% 넘는다는 건 굉장한거예요. 입장객 수로 보면 대만,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순인데 일본은 추정치에요. 瞿?사람들은 더 이상 깃발 따라서 다니는 관광은 하지 않기 때문에 집계가 안돼요.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방문객도 마찬가지고. 그 숫자까지 따지면 20만 명이 넘을거라고 봐요. 내셔널데이(특정 국가 기념일을 남이섬에서 거행하는 행사)에 한 번 왔던 사람들은 스스로 가이드가 되서 자기 나라 사람들을 또 데려오더라고.

-남이섬이 이렇게 자리를 잡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남이섬이 안정적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티스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얼마 전까지는 남이섬이 관료들의 운영에 따랐지만, 이제는 아티스트 중심으로 가고 있거든. 아티스트들의 기여도가 높은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남이섬에서는 아티스트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조경이 들어가고, 건축이 들어가고 하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돼요.

-남이섬을 이만큼 바꾸어 놓았으니, 다른 욕심은 생기지는 않습니까.

▦남이섬이 잘 나가니까 내가 섬 전문가인줄 알고 맡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비슷한 유형의 관광지들을 연방공화국으로 묶을 생각이요. 산정호수, 평강식물원, 베이징 나미나라, 프랑스문화원 등 여러 관광지들을 묶어서 나미나라 여권 하나로 관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거예요.

지난 가을 기자는 가족들과 함께 남이섬을 찾았었다. 그 때 남이섬 바닥은 온통 송파구에서 가져온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곳곳에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속절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은 불 속으로 스러져 가고 있었다.

-올 때 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납니다.

▦서장대(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6호)가 불타고 난 다음 타고 남은 목재를 사왔어요. 낙산사의 불탄 목재도 사왔고. 그걸로 똑 같은 서장대 낙산사를 만들거요.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 되는거지. 난 불이 났다든지, 무슨 건물이 무너졌다는 소리만 들으면 직원들에게 무조건 가서 주워오라고 해. 버려지는 역사들의 잔재를 가져와서 역사와 문화의 흔적으로 전환시키는거야. 중앙청 기단 돌 하나만 있으면 남이섬에 일본관광객 1,000명을 불러모을 자신이 있어요.

-관광지가 바뀌어야 할 점도 있지만 관광객이 바뀌어야 할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광객을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관광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우리 국민의 민도가 낮지도 않지만 높다고 볼 수도 없어요. 한국에서 문화인의 기준은 줄잘서고, 침 안 뱉고, 소변기에 다가가서 오줌 누면 끝나요.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거든. 아무리 관광지가 좋아도 관광객이 진지하지 않으면 안돼요. 일본인은 남이섬에 와서도 메모를 해 가지고 가요.

한국인은 설명판이 없다고 불평을 하지만 막상 만들어 놓으면 안 읽고 그냥 가요. 중국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중간 정도예요. 남이섬에는 TV도 없고, 노래방도 없어요. 밤이 되면 섬에 묵는 관광객들 중에는 '노래방 어딨냐'고 묻는 이들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그런 것 없으니 책읽고, 도자기 만들라'고 하지. 하지만 관광객도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조금씩 진지해側?있는거지.

-남이섬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제일 걱정은 직원들이 '우리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거예요. 영속성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우리 직원들이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요. 국제 행사들이 꽤 많은데 우리 직원들이 다 해내요. 비결은 다른게 없어요. 음식을 예로 들면 방문객이 세계 어디서 오든지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면 될 거 아니냐는 단순 소박한 마인드로 해결하거든.

작년 5월 한달간 22개국 대사가 다녀갔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그래서 하는 얘긴데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겠다고 정부에서는 자꾸 외국에 나가잖아. 그런데 그게 아녜요. 한국관광이 돌파구를 찾으려면 외국 나가서 엑스포할게 아니라 여기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나가서 출장비만 까먹을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맛을 보여줘야 해. 아니, 사진 보고 한국 올 사람이 누가 있나? 내가 당국자가 된다면 다 바꾸고 싶어.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가는 중에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실에 들렀는데 한 여직원이 먹으로 화선지에 윷판을 그리고 있었다. 강사장은 그걸 보더니 "이리 줘 봐. 이렇게 하면 좋지 않아?"하고 자기가 막 그렸다. 그게 못 마땅 했는지 그 여직원은 "아유. 사장님 그게 뭐예요."라고 투덜댔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그는 목발을 내던지고 절뚝 거리며 포즈를 취했다. 그는 취재 전 "4시에 서울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이미 시간은 3시를 넘고 있었다. 비서와 홍보업무를 겸하고 있는 여직원이 "사장님 빨리 가세요. 늦겠어요"라고 졸라대 듯 말했다. 직원들이 강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딸이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 했다. 강사장은 귀찮은 듯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은 했지만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점심도 굶고 눈길을 4시간이나 달려와 취재를 하던 기자는 그런 그의 열성에 감읍할 뿐이었다.

◇약력

▦ 1953년 단양 출생

▦ 홍익대학교 그래픽디자인 학사

▦ 홍익대학교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 석사

▦ 경희대학교경영대학원 노사인력관리학 석사 수료

▦ 98 제51회 프랑스 칸영화제 공식포스터 제작자 선정

▦ 99 디자인미술관 운영위원회 운영위원

▦ 2000 알씨컨텐츠 대표이사

▦ 2001 남이섬 대표이사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의 외인구단 (이이화, 박재승)  (1) 2008.03.10
서울시 신청사 설계 당선 - 유걸  (0) 2008.02.19
개척정신과 도전정신  (0) 2008.02.06
김훈(남한산성)  (0) 2008.02.04
박태준  (0) 2008.01.29
by 끝없는 바다 2008. 2. 1. 11:40

박태준

[‘한국의 상징’ 릴레이 인터뷰(1)] “샌드위치 위기론? 지독하게 붙으면 日 따라잡는다”
포스코 전설의 ‘우향우 정신’ 지금도 필요…李 당선자, 노동계 리더와 대화 시작해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조인스]2008.01.28 14:55 입력 / 2008.01.29 08:54 수정
■ “내가 대선배여서 李 당선자가 어려워했는데, 이제 거꾸로 될지 모르죠.”
■ 이병철 회장 “견실한 재무구조 인정”… 이후 의기투합했다
■ 정주영 회장, 포스코 둘러본 후 자신감 얻어 조선소 기공식 나서
■ 김우중 회장, 넘치는 아이디어 관철하지 못해 곤경에 처해
■ 3선 개헌 지지 서명 거절… 박 대통령 “그 친구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해”


박태준은…
1927년 9월29일 경남 양산 출생
1947년 일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중퇴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 임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1963년 육군 소장 예편
1964년 대한중석 사장
1968년 포항종합제철 사장
1976년 제철학원 이사장
1981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1981년~ 11·13·14·15대 의원
1990년 민정당 대표, 민자당 최고위원
1992년 포항종합제철 명예회장
1997년 자민련 총재
2000년 32대 국무총리
2001년 포스코 명예회장

월간중앙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경제인 3위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선정됐다. 생존자 중에서는 1위다. <월간중앙>은 이번 호에 박태준과 박세리(스포츠인 1위), 이어 다음호에는 박경리(문화예술인 생존자 1위)·박원순(운동가 생존자 1위) 등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할 예정이다.
오피니언리더 10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월간중앙> ‘한국의 상징’ 서베이에서 한국 경제계의 두 거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그는 오늘의 포스코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자 격변기 대한민국 정치·경제사의 산 증인이다.

지난 1월12일 오후 일본 규슈(九州)의 피한지 가고시마(鹿兒島)에 머무르고 있는 박태준 회장을 찾았다. 팔순 원로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한국 경제계의 살아 있는 상징에게 한국 경제의 길을 물었다.

- 현존하는 경제계 인사 중 가장 많은 분들로부터 한국을 상징하는 경제인으로 지목받았습니다. 어떤 면모가 평가받았다고 자평하십니까?
“새로운 일을 한 것, 어찌 보면 무에서 출발한 국가기간산업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키웠다는 것을 알아주신 모양이죠. 그 과정에서 사심 없이 국가에 헌신해 ‘제철보국’을 실현한 것이 평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비판받을 일은 평생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하는 국민적 분위기 잡아야

- 한국을 상징하는 경제인으로서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해법은 무엇일까요?
“작금의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 하는 분위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에서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민이 국가경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협력하는 마음자세가 돼 있지 않아요. 대선 이후 조금 달라지는 기미가 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실 그 동안 경제 하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정치제일주의가 팽배하면서 경제를 잘해보려는 노력도, 지도력도 실종된 상태였죠. 정치적 이전투구와 극한대결, 사회적으로 집단적 억지와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으니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다른 것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국민과 노조는 협력하고, 기업은 분발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다시 한 번 해보자’는 공감대가 우리 사회에 형성됩니다. 물론 경제가 전부는 아니에요. 그러나 경제가 외교·국방·정치·남북관계·문화 등 국가경영의 토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한국경제의 활로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경제가 성장동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국민적으로 경제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활력을 되찾을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5% 성장은 해야 하는데, 지도자가 잘하고 그에 따라 사회 분위기가 한번 잘해보자는 쪽으로 조성되면 여기에 1~ 2%를 더할 수 있습니다.”

- 공교롭게도 대선 당시 이명박 당선자가 7% 성장을 공약했는데요. 이 당선자에게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사실 국가 지도자와 정치권이 경제를 해보자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 노동계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죠. 다행히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노선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전통적 계급투쟁노선을 버리고 말 그대로 실용노선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왜 이명박 당선자가 노동계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미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아일랜드와 같은 리더십과 국민적 결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손바닥 하나만으로는 박수를 칠 수 없어요.”

이틀에 걸쳐 박 회장을 만나고 난 다음날인 지난 1월14일 이명박 당선자가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 당선자는 올해 7% 성장은 어렵겠지만 6%는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7% 성장 공약에 대해서는 임기 5년, 길게는 10년간의 경제계획을 중심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 이 당선자와의 알려지지 않은 인연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나는 포항에서 오래 일했고, 아시다시피 당선자도 포항 사람이죠. 당선자가 기업에서 오래 일하는 동안 선후배로서 어쩌다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당연히 그 시절에는 내가 대선배였죠. 그때는 나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앞으로야 거꾸로 될지 모르지만.(웃음)”

국제경쟁에서 밀리면 끝장

-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가 당면한 최대 문제로 ‘국가 비전의 상실과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를 꼽습니다. 대한민국의 비전이 무엇이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명박 당선자에게 어떤 리더십을 기대하시나요?
“대한민국의 장래는 국제경쟁에 달렸습니다. 국제경쟁에서 밀리면 대한민국은 끝장입니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이 나라가 제자리를 지킬 수 있어요.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인도·러시아 등에 추월당했다가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내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세계가 시장입니다. 그런데 국제경쟁에서 이기려면 국민이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명박 당선자에게 무엇보다 통합의 리더십을 주문하고 싶어요. 국가경쟁력이 국민통합 없이도 강화될 수 있을까요? 나는 어렵다고 봅니다. 드라이브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공약이 이런 비전과 부합하고, 어떤 공약이 통합에 역행하는지 이 당선자가 심각하게 고민하기 바랍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비서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도 중요합니다.”

- 대통령비서실은 비서실장 원톱 체제로 가는 것 같습니다. 청와대는 강화되고 총리의 권한은 약화되는 모양새죠.
“그럴수록 비서실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조정 역할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럴 때일수록 권한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비서실장을 맡아야 합니다.”

- 이병철·정주영 회장과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기업인 중 이병철 회장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래 우리나라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경제 기반이 약하다는 거였죠. 일본도 메이지(明治)유신 때 시작해 실질적으로는 2차대전 이후에나 성공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죠.

한번은 걱정이 된 이 회장이 나를 찾아왔습디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죠. 나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인에게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1시간20분 걸려 설명하고 나서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재무구조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삼성도 포스코 이상 빚이 있고, 현대는 아마 삼성보다 빚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 이 회장이 인정해 주니 고맙기도 하고, 자부심도 생겼죠. 그 후 삼성에서 자기네 이사회에 참석해 달라, 식사를 같이하자 등 이런저런 요구가 많았어요. 삼성 연수원도 우리 연수원 보고 가서 지은 거예요.

정주영 회장은 현대조선을 만들기 전 포항에 왔었습니다. ‘박 회장, 나 배를 만들려고 그래’ 하기에 우리도 조선용 후판을 만들 것이라고 했죠. 그렇게 우리 공장을 둘러보고 난 후 자신감을 얻어 조선소 기공식을 했습니다. 정 회장은 참 실질적인 분이었어요. 되겠다 싶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 정 회장의 그런 추진력과 이병철 회장의 합리성, 이 두 거인의 장점을 박 회장님이 잘 갖추신 것 같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제철소라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합니다. 커다란 고로에서 쇳물이 나오면 다시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치죠. 다이내믹하다고 할까요?”

“대운하는 신중히” 권유

- 이번 <월간중앙> 서베이에서 경제인 4위는 최근 특별사면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습니다.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을 늘려 국난을 극복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죠.
“나도 한 제안입니다. 축소조정의 방향이 아니라 확대조정으로 가자는 것이 골자였죠. 축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하던 일도 그만둬야 하고 국민의 사기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외화의 밸런스는 조절하되 확대조정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아이디어가 많은 분이었어요. 행동력도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죠.”

- 그러고 보면 기업가정신이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느낌입니다. 투자가 부진한 것도 이런 기업가정신의 약화와 관계가 있는 듯싶고요.
“ 그런 점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 전체의 기강이 해이해진 듯합니다. 공무원사회도 그렇고, 기업 쪽도 그렇고.”

- 새로 들어서는 정부에 기업가정신의 고취를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당선자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 한반도대운하는 어떻게 보시나요?
“당선자와 둘이 식사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하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은 있지만 제대로 스터디해 보지 않았어요. 어쨌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이명박 당선자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공무원 시절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비서실 등에 오래 근무했다. 요즘 새 정부 첫 총리 인선 작업을 하고 있는 정 의원은 2001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모신 18명의 총리 중 가장 부지런했던 사람으로 박태준을 꼽았다. 박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4개월간 총리로 재임했다.

- 총리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이 당선자는 대학 총장 출신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만.
“장관회의는 기업으로 치면 중역회의입니다. 총리 시절 비서실에 회의 준비를 착실히 시켰죠. 확인도 철저히 하고. 그러다 보니 장관들이 대통령보다 내 앞에서 더 긴장합디다. 총리는 행정을 알아야 합니다.”

- 이 당선자를 일본 쪽에서는 어떻게 봅니까?
“일반적으로 한·일 관계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 중국의 추격은 무섭고 일본과의 격차는 좀처럼 좁히기 어렵다는 이른바 ‘샌드위치론’을 어떻게 보시나요?
“과거 신일본제철의 사이토 회장은 ‘부메랑론’을 폈습니다. 한국에 기술을 이전한 결과 따라 잡혔다는 거였죠. 그러나 스승보다 나아지는 것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보답입니다. 포스코가 그 실례죠. 지독하게 따라붙으면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느슨하게 해서는 물론 못 따라잡죠.”

- 이번 <월간중앙> 서베이에서 포스코가 삼성·현대·LG에 이어 건국 후 한국사회를 상징 혹은 대표하는 기업 4위에 꼽혔습니다. 포스코가 앞으로 어떤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십니까? ‘우향우 정신’이 21세기에도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한마디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우뚝 서야죠. 포스코에서는 창업세대가 심어놓은 애국심, 기업정신, 구성원들의 좋은 분위기, 애사심 그리고 책임자들의 우수한 자질 등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기업이라는 위상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우향우 정신은 지금도 필요합니다. 우향우가 뭐냐? 사심 없이 헌신하자는 거예요. 무한경쟁, 사생결단의 국제경쟁시대일수록 기업들이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향우 정신이란 박 회장이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한 데서 유래했다. 제철소에 투입된 대일청구권자금은 일제강점기 조상들이 흘린 피의 대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정신은 포스코에서 지금도 작동한다. 포스코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을 취재하러 2006년 가을 포항제철소를 찾았을 때 배진찬 파이넥스2공장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향우 정신’은 21세기에도 ‘약발’

“파이넥스 공장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입니다. 1968년 영일만의 모래 벌판에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박태준 사장은 이렇게 말했죠. ‘만일 실패하면 전 임직원이 바로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경영자의 확신과 기술자의 집념·열정이 만나지 않았다면 이 ‘꿈의 기술’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배 공장장은 덧붙였다.

1992년 정계에 몸담고 있던 박 회장은 포스코에 고로 없이 쇠를 만드는 신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권했다. 21세기에는 환경문제로 인해 고로(용광로)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견이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까지 쇳물은 고로에서만 뽑아냈다. 14세기 이래 고로 방식은 제철공법의 대명사였다. 박 회장의 권유를 받고 포스코는 곧바로 신공법 개발에 착수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공법이어서 참고서도 없었다. 포스코는 그러나 시행착오를 수없이 거듭한 끝에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지난 1월10일 열린 포스코 ‘2008년 CEO 포럼’에서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파이넥스 공법의 경제성에 대해 목표의 95%는 달성했다”고 말했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지금도 포항제철소 구내 곳곳에 걸려 있는 박태준 회장 재직 시절의 표어다.

- 박태준 경영의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경영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외국의 사례에 한국적 요인을 접목해 플러스 알파를 찾아내는 거죠.”
- <이코노미스트>가 2006년 오피니언리더 서베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10가지 화두를 뽑았습니다. 고용불안, 정치적 리더십 부재, 저출산-고령화, 집단이기주의, 경쟁력 낮은 교육, 노사갈등, 기업활동 규제, 분단 체제와 그 비용, 반기업·반부자 정서, 성장동력의 소진 등이었죠. 경제문제와 경제외적 문제가 뒤섞여 있습니다. 경제외적 문제 가운데서는 어느 것을 가장 우려하십니까?
“리더십 부재, 교육의 난맥, 집단갈등, 분단, 국민정서 등이죠. 무엇보다 리더십 문제가 큽니다. 개인적으로 군에서, 기업에서, 그리고 정치현장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나름대로 실천적 노력도 했고요. 리더가 잘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따라가는 편이 유리하니까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일본 메이지유신과 개국의 모태가 된 가고시마 시내를 가리키고 있다. 뒤쪽으로 보이는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용암을 분출하는 활화산이다.


1978년 8월 중국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신일본제철소를 찾았다. 기미츠(君津)제철소를 둘러보던 이 작은 거인이 신일본제철 측에 “중국에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본제철 회장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습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이나야마는 “포철은 기적”이라고 덧붙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덩샤오핑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

이 얘기를 박태준에게 전한 이나야마는 그에게 “중국이 당신을 납치할지 모른다”고 농담했다.

1990년 11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철강산업에 끼친 공로를 평가해 박태준에게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을 보내왔다. 미테랑 대통령은 축사에서 박태준을 이렇게 치하했다. 박태준에게 바친 헌사였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인을 찾았을 때 당신은 기업인이 됐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됐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삶에서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덩샤오핑 “박태준 수입할까요?”

- 미테랑 대통령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군장교·기업인·정치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어느 길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느 길을 가시겠습니까?
“모든 길에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놓쳤지만, 나는 교육에서도 특별한 보람을 느낍니다.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 산하의 열두 학교는 언제 떠올려도 포스코를 대할 때처럼 가슴이 뿌듯해지죠. 나는 인생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업인으로서 포스코를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일본의 각계 지도자들을 설득했던 것이 특히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애국심을 발휘했고, 일본사람들의 영혼과 신뢰를 얻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다시 애국심을 발휘할 것이고, 그러면 결과는 더 좋겠죠. 그 사이 우리나라는 더 발전했고 국민도 더 성숙해졌으니까요.”

이대환은 박태준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그를 이렇게 평했다.

“생존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뒤를 좇아 현해탄을 건너간 수많은 식민지 아이들 가운데 사춘기를 벗어난 무렵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신생 독립국의 어른으로 성장한 다음, 유·소년기에 어쩔 수 없이 익혔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로써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게 조국에 이바지한 인물은 박태준일 것이다.”

- <일본경제신문>도 3년 전 고위 관료와 기업인을 대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경제인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마쓰시타전기의 창업주인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회장이 1위를 차지했죠. 마쓰시타 회장은 박 회장님처럼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마쓰시타정경숙을 창립했습니다. 마쓰시타정경숙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정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마쓰시타 선생이 정경숙을 세웠듯 나도 포스텍(포항공대)과 일류 학교들을 세웠는데….(웃음) 일본이 2차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 선진국으로 올라섰지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마쓰시타의 생각이었죠. 마쓰시타정경숙의 탄생 배경입니다. 그분의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번영하는 사회라야 이뤄지고, 지속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좋은 정치가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좋은 정치가는 좋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니 좋은 사람을 계속 길러내자 이겁니다. 한마디로 정치분야에서도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발상이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국가적으로는 물론 기업으로서도 필요합니다. 포스코는 ‘창의는 무한, 자원은 유한’을 회사의 운명이 걸린 슬로건으로 삼았는데,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죠.

한국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내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국회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기업·연구소·관료 조직·언론에는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드는데, 정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래서는 우리 정치의 미래가 밝아지기 어려워요.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정치를 개혁하려면 그 첫걸음으로 ‘일급의 젊은 인재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 포스텍은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일관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포스코의 교육사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제철소에는 고가의 설비가 많습니다. 그래서 보험에 드는데, 보험회사에서 리베이트로 7,000만 원이 나왔습니다. 지금 돈으로 700억 원 정도 될 거예요. 그 돈을 당초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중요한 선거가 많았는데 번번이 ‘정치자금은 절대 못 낸다. 돈이 나올 데가 없다’며 버텼거든요. 막상 그러면서도 가슴이 아팠죠. 보험회사에서 들은 대로 리베이트는 보험사 예산에 책정돼 있는 돈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이 분이 다시 돌려주면서 나더러 마음대로 쓰라는 거예요. 포항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죠. 사원주택은 지었는데 학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철장학재단을 만들고 각급 학교를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갔죠.”

박태준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 박정희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탄도학 강의 첫 시간에 교관 박정희가 낸 고난도 문제를 박태준이 푼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5·16군사정변 직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가 박태준을 자기 부대로 끌어가기도 했다. 박정희는 그러나 정작 5·16을 일으키면서 박태준을 배제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자네를 가장 신뢰했기 때문일세. 만약 내가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내 처자식을 부탁하려고 했네. 군의 장래를 위해서도 자네 같은 사람이 남는 게 좋고.”

이대환은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이 말을 듣고 난 박태준은 콧잔등이 시큰했다고 기록했다.

3선개헌 때의 일이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해 예비역 장성들까지 3선개헌 지지성명에 동원했다. 박태준은 그러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젊은 인재들이 진출하는 국회 돼야

▶박태준 회장은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하던 1954년 백년가약을 맺은 부인 장옥자 여사와 사이에 1남4녀를 두었다.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내버려둬.”

박 회장은 자신의 그런 남다른 면을 보고 박 대통령이 제철소 건설을 맡겼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솔직히 나한테 잘 맡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맡았으면 아마 부실기업 됐을 거예요. 절대 관리를 못했을 것입니다.”

- 그런 성격에 정치는 잘 안 맞았겠습니다?
“누가 보든 말든 나는 성격을 드러냅니다. 사실 건전한 사람들 눈에는 우리나라가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불건전한 것이 많아요.”

- 정치를 더 있다 하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우리 정치도 많이 건전해졌거든요.
“나는 애초에 정치를 할 생각이 없었어요. 어쩌다 끌려간 거지. 숫자 맞춰 주러.”

- 일급의 젊은 인재들이 왜 국회에 들어가지 않는 걸까요?
“우선 국회의원들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어요. 기업인에게도 정치자금 달라는 소리나 했지 규범적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기업인들도 물론 책임이 있죠. 그런 점에서 일본사회가 부럽습니다. 일본은 서로 인정합니다.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이 일본경제를 일으키느라 고생했다고 인정하고, 기업인들은 정치인들이 패전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합니다.”

-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을 많이 닮았습니까?
“많이 닮았지. 닮은 데가 많아요.”

박 회장은 김우중 전 회장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경제인들 사이에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을 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김우중 회장이 한창 뜰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김 회장더러 대통령선거에 나가라고 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김 회장이 펄쩍 뛰면서 ‘나는 자격이 없고, 할 만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답니다. 그러고는 나를 찾아온 거예요. 자꾸 찾아오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죠. 나중에는 강원룡 목사까지 가세했어요.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한다’였죠.”

-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이 확실시됐을 때 직접 집권해야겠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그런 생각 했으면 타협했겠죠. 그랬다면 YS가 먼저 하고 그 뒤에 하고 그랬겠지. 그런데 타협 안 했잖아요? 민자당에서 3년 동안 김종필 총재(JP)와 셋이서 매일 아침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요. 일을 같이 안 했다면 모를까, 같이 해봐서 아는데 어떻게 밉니까?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결국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저질렀지. 외환이 고갈된 상태에서 수습해 달라고 나한테 왔습디다.”

- JP는 어떻게 보셨어요?
“JP야 유능하지.”

박 회장이 묵고 있는 시로야마호텔은 가고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그 바다에 지금도 용암을 분출한다는 화산섬 사쿠라지마가 떠 있었다. 사쿠라지마는 해신의 옆 얼굴을 연상시켰다. 배영을 하듯 얼굴만 내놓고 누운 해신.

김우중 한때 ‘박태준 대통령’ 추진

인터뷰가 길어지면서 평화로운 한 폭의 수채화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승용차를 타고 가고시마 시내의 일본 전통식당 산에이(山映)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 식당은 아버지와 아들이 주방에서 일하고, 어머니와 딸이 서빙을 했다. 서글서글한 외모의 딸은 영국 유학파라고 했다.

- 가업을 잇는 풍습은 민족성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이런 음식점을 물려주려고 해도 자식이 달가워하지 않기 일쑤죠.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듯싶습니다. 음식점이 고달프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일본사람들은 부모가 한 일 나라고 못할까, 이렇게 생각하죠.”

- 한국의 젊은이들이 청년실업으로 고통을 겪고 있고 취업을 해도 비정규직, 이른바 88만 원 세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원로로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들려주시죠.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딱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전자의 경우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고, 후자는 사회 분위기 탓이 큽니다.

후자에 속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군요. 경제 발전, 민주주의 발전의 혜택을 그런 식으로 누리려는 것은 자기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젊은 세대에게 ‘항상 10년 뒤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해왔습니다. 세대 간 대화도 필요합니다. 젊은 세대는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이고 내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알아야 합니다. 더불어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를 질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어쩌다 원로 없는 사회가 돼버린 것 같습니다. 원로 대접도 제대로 안 하고, 원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원로들이 할 말을 합니다. 원로로서 발언도 하고, 이들에게서 훈련받은 사람들도 원로를 선배로 대접하죠. 결국 사회 분위기가 제대로 잡혀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틀렸어’ 하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틀린 사람도 많지만 옳은 말 하는 사람도 많은 것을 알아야죠.”

글·사진■이필재 월간중앙 편집위원
jelpj@joongang.co.kr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의 외인구단 (이이화, 박재승)  (1) 2008.03.10
서울시 신청사 설계 당선 - 유걸  (0) 2008.02.19
개척정신과 도전정신  (0) 2008.02.06
김훈(남한산성)  (0) 2008.02.04
강우현 남이섬 사장  (0) 2008.02.01
by 끝없는 바다 2008. 1. 29. 09:05
| 1 2 |